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본토 공습 (문단 편집) == 1944년 이전 == 역사적으로 미군의 첫 일본 본토 공습은 [[진주만 공습]] 발발 4개월 후인 1942년 4월 18일 [[둘리틀 특공대]]에 의해 감행되었다. 둘리틀 공습은 해당 항목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타격을 주기보다는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무리하게 감행된 정치적, 선전적 목적을 가진 작전이었다. 여기서 '미군'으로 한정해 표현한 이유는, [[중일전쟁]] 초기인 1938년 5월에 중국 공군이 일본 본토 공격을 [[http://blog.naver.com/atena02/100196370311|감행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공군의 소련제 [[SB(폭격기)|SB-2]] 폭격기 2대(자료에 따라선 마틴 [[B-10]] 폭격기인 것도 있다)가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 상공까지 온 것. 또한 이 때 중국군 폭격기가 투하한 것은 폭탄이 아니라 '''일본군의 만행을 비난하는 선전물([[삐라]])'''들이었다. 작전을 수행한 폭격기들은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고 무사히 귀환했다. 작전으로 인한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고 이후에도 중국 공군은 더 이상의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 작전을 시행하지 않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의 대공 방어 체계가 부실했다는 점이다. 일본군 수뇌부는 이 사건을 단순 해프닝으로만 생각하고 대공 방어의 증강 등 대응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으며 이후의 둘리틀 공습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가까이 영국 본토가 위치해 수시로 공습 위험이 있던 독일과 달리 일본은 당시까지만 해도 만만한 중국을 제외하면 사방이 태평양이라 대규모 공습의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둘리틀 공습으로 도쿄, 오사카 등 주요 대도시에 폭탄 몇 발을 투하하긴 했지만 당연히 몇 발의 폭탄으로는 실질적인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물론 실제적인 피해 규모와 별개로 둘리틀 공습도 일본인들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렇지만 진주만 기습 직후 연이은 패전으로 사기가 낮아진 미국민들에게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일본에게는 신주불멸(신께서 지켜주는 일본)의 허상을 깨뜨리며 위협을 주었다. 1943년 중반, [[알류샨 열도 전역|알류샨 열도의 애투 섬, 키스가 섬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미군은 [[쿠릴 열도]] 북단의 몇몇 섬들에 [[B-24]] 폭격기와 일부 항모 함재기를 동원해 공습을 가해 군사시설을 파괴했다. 이 작전도 일본 본토 공습의 범주에 포함되는데, 흔히 인식하는 일본 본토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졌지만 어쨌든 쿠릴 열도는 당시까지만 해도 [[홋카이도]] 관할의 내지였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역시 본토와 멀리 떨어진 외딴 섬에서 벌어진 [[이오지마 전투]]도 일본 본토에서의 첫 지상전투로 기록된다. 1943년까지는 미국이 일본 본토에 공격을 가할 방법이 마땅찮았다. 그나마 일본과 가까운 미국 영토 중 [[웨이크섬]], [[괌]], [[필리핀]]은 모조리 1941~1942년 초기에 걸친 [[남방작전]]의 여파로 상실한 상태였다. 기지를 제공할 수 있는 동맹국 중 중국은 일본과 가까운 해안지방을 모조리 상실한 상태였고, 영국 역시 이 무렵 일본군에 의해 미얀마-인도 전선까지 후퇴한 이후였다. 그리고 소련은 대독전에서의 동맹국일 뿐이지 대일전에서는 아직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과 일본을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이 1944년에 들어서자 급변한다. 그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못하던 '''초장거리 전략폭격기 [[B-29]]'''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